
뿌리 없는 사람들의 저울
경수는 갑작스러운 장거리 출장 명령에 매우 불만이었습니다.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. 그러나 그는 불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습니다. 도시 감정의 변화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게 그의 모습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.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. 이렇게 감추기를 좋아하고 나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철저히 보호하는 그였습니다. 그러나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빤히 드러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. 트럼프나 화투놀이를 할 때였습니다. 곧잘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면서도 이런 도박에 있어서는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그런 표정의 심장에 털 난 사람들과는 정반대였습니다. 그의 출장지는 장거리일 뿐만 아니라 차편이 매우 불편한 곳이었습니다. 정읍에서 차편이 하루에 두 번뿐이라는 S면에서도 십리를 걸어야 되는 곳이었습니다. 그의 출장이 의도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했습니다. D보험에서는 백만 원 미만의 보험금을 지급하는 경우, 전적으로 지사장의 의견을 존중하여 가부를 결정하는 게 관례였습니다. 그런데 지급함이 가하다고 사료됩니다 라는 지사장의 의견서가 붙어 있는 오십만 원짜리 관계서류 하나를 덜렁 쥐어주며 당일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. 그동안 전 주임의 수고가 많았기 때문에 이건 위로 출장 명령을 내준 거였습니다. 과장은 생색내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.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사에 감사를 거듭할만한 출장이었습니다. 고액이라면 더욱 신경이 쓰이겠지만 일차적으로 지사장이 책임을 지고 나선 소액 출장인 데다가 기간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. 그러나 불만이 그의 가슴속에서 싹이 튼 것은 고액사고를 출장 처리하여 결제에 돌렸는데, 그 결과가 판명이 나기도 전에 장거리 출장 명령이 났다는 점이었습니다. 삼백만 원짜리나 되는 고액이었습니다. 회사 자산 몇 백억중 삼백만 원이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하자면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지만 서민으로서는 한 손에 쥐어보기 힘든 금액이었습니다. 그나마도 그 계약은 사귀였습니다. 혹시라도 지급 심사과정에서 친구가 방문하였다는데 회사 측에서 오해라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. 그렇다면 그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습니다. 자칫하면 기밀을 누설했다고 욕을 먹을 법도 한 일지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. 나는 왜 그런 못나빠진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. 옷깃에 유명인사의 딱지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. 그렇다고 회비 부담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한 자격지심을 느낀 것 같습니다. 그래도 일행 중에 땡초 같은 사람이 끼어 있다는 게 여간 위안이 되었습니다. 그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. 그가 내 눈길을 끈 것은 도대체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였습니다. 그러니까 심장에 털 난 사람들만이 모인 것 같은 자리에 숫기라고는 반푼 어치도 없는 사람이 끼어있다는 게 오히려 흥미를 끌게 하였던 것입니다. 회원들은 그를 땡초라고 지칭했습니다. 그의 별명이 어떻게 되어 땡초인가를 확연히 아는 사람도 없는 모양이었습니다. 그가 모 전문학교 교수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땡초로서 내 뇌리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뒤였습니다. 이번 산행은 주관한 B클럽 대표가 나의 고향 사람이요, 가는 곳이 나의 고향에 있는 산이 있습니다. 의도적으로 나의 고향 사람들만 연락하여 이 산행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마치 향우회에서 야유회를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. 그러니깐 이 산행에는 B클럽을 통해 그전부터 참가한 사람도 있고 나처럼 처음으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습니다. 언제 어디에선가 한 번쯤 얼굴을 대한 적이 있었던 얼굴이 있는가 하면 전혀 낯선 얼굴도 많았습니다. 그러나 고향을 찾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자기소개의 차례가 되면 마치 자기 자랑 경연대회에 참가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과장을 드러내어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. 그런 과장 벽이 어쩌면 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 친밀감마저 느끼게 했습니다. 그러나 과장은커녕 자기소개마저 적당히 땜질하고 마는 땡초는 몹시 곤혹스러워 보였습니다. 저는 박이라고 합니다, 대절해서 달리고 있는 버스의 운전석 뒤에 설치된 마이크에 대고 이 한마디를 삐쭉 던진 땡초에게그 이름은 땡초! 하고 누군가 기성을 질렀습니다. 아냐 땡초가 아니고 땡추야! 땡추나 땡초나 호적도 아닌데 뭘 그래. 뒷자리에서 야유를 퍼부었지만 그는 벌써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자리로 돌아가버린 뒤였습니다. 어쩌면 땡초는 참가자들의 다양한 모습에 구색을 갖춘 존재에 불과했습니다. 아니, 어쩌면 그는 이 산행의 화려한 인물의 품속에 묻혀버린 관심 밖의 존재라는 게 더욱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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